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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진정한 것

몇백 년 된 큰 나무 같은 곳 2025. 1. 15. 00:33
 


그 사람 어떤 사람이에요?



괜찮은 사람이에요. 
주변 사람들 품평도 좋고, 성품도 바르고, 사람이 선해요. 
열심히 살고, 자기가 한 말은 잘 지킬 줄 알고, 학교는 어디를 나왔다더라…”
 
 
 
항상 진정한 것에 목말라 해왔다. 그런데 정작 진정한 것을 바라보는 방법을 잘 몰랐다. 나 스스로 하는 자신에 대한 평가도, 또 내가 어떤 일에 접근하는 방식도, 누군가를 알아가는 일도, 거의 형식에 치우친 방식들이었다.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은 주로 외연적인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듯 말한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그것은 ‘한계’와 ‘두려움’ 때문이다.
 
먼저 한계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간단히 말해 이해의 한계다. 이해의 한계 안에는 ‘인지’의 한계, ‘해석’의 한계, ‘소통’의 한계가 있다.
 
그러니까 그것밖에 느낄 수 없고(인지의 한계), 알 수 없기 때문에(해석의 한계), 따라서 그것밖에 말할 수 없으며, 그것을 가지고밖에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소통의 한계).
 
또한 두려움이 있다. 나의 진실을 드러내는 일에도, 상대의 진실을 알아가기 위해 누군가의 본질 속으로 둘어가는 일에도, 다양한 빛깔의 두려움이 있다.
 
가령 내가 알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모두 알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내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정보들인데, 실은 그것이 그의 본질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그것을 대체하는 도구들이 빛을 발하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통해 직접 느끼고 알아가지 못하는 존재적 깊이의 영역에 해당하는 부분을, 예술(음악, 문학, 그림 등의)과 학문(심리학, 상담학)과 종교가 대신하곤 하는 것이다. 사람 대 사람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들은 상당한 부분이 외연과 형식에 해당하는 영역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누군가 한계와 두려움을 뚫고서 기꺼이 존재의 폭풍우 속으로 뛰어들 만한 열정이 생겨 사람 대 사람으로써 나누려고 달려 든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토록 용감하고, 무모해 보이는 달려듬의 현상은 사랑의 열정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할 것이다.
 
 
 
문득 뭉클해져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만일 내가 글을 그렇게 진정하게 쓴다면, 이 모든 것들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을 알아볼 것이라는, 일말의 자신감이 생기자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잘 하면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겠다고, 지금도 여전히 나는 살아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음 한구석이 저려오는 그 감각의 이름은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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