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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의 쿠폰 강박기

몇백 년 된 큰 나무 같은 곳 2025. 1. 7. 23:22



시간은 또 다시 아홉 시 반. 써야 하는 쿠폰들의 압박이 다가오는 시간대였다. 늘 이런 식이었다. 유효기간이 오늘까지인 쿠폰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시간을 보면 늘 이십 분, 삼십 분이 남아 있었다. 하루종일 다른 일로 바쁘거나 한가하게 있다가 어둑한 밤에 퍼뜩 생각이 나서 준비하고 내달려 숨가쁘게 도착하면 문을 닫기 일 분 전 이 분 전, 또는 문을 닫고 난 일 분 후, 이 분 후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쿠폰을 사용하기 위해 남아있는 시간은 숨가쁘게만 느껴졌다. 가야 할 매장들의 마감 시간까지는 삼십 분이 남았는데 나는 씻지도 않았다. 물론 외출복도 입지 않았고, 그에 비해 산적해 있는 쿠폰과 포인트는 버거웠다.

스타벅스 음료 쿠폰 두 개와 복수의 계정에 약간의(정말 약간의- 이 부분은 강박의 영역인데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서점 포인트들이 있었다. 목적지까지는 자전거로 칠팔 분 정도가 걸린다. 다 사용하려면 고르고 주문하기까지 아무리 빨라도 십오 분 정도는 필요했다. 그러니까 나는 태초의 상태에서 오 분쯤 안에는 집을 뛰쳐 나가야 했다.

서두른다고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고 날쌔게 자전거를 굴러 서점에 도착하자 아홉 시 오십 분이었다. 외워두었던 위치로 뚜벅뚜벅 바로 걸어가 칼바르트에 대한 책 한 권을 집어들고, 큰 고민 없이 원두 드립백 두 개와 매콤한 맛 쫀드기 두개도 집어들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먼저 내 계정으로 책을 결제하고, 포인트들이 지인들의 계정에 조금씩 들어가 있어서 지인들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장을 열고, 날쌘 제비처럼 하나씩 전화번호를 입력하며 결제..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방금도 열었던 전화번호 메모장 검색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매운 쫀드기 두 개는 결제했고, 드립백 두 개를 하나씩 포인트를 소진하며 결제하면 되는데. 폰 용량이 얼마 없어서 메모리적인 부분(?)에 오류가 생겼는지 아무리 검색해도 찾으려는 메모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카운터 앞에 서서 직원과 공수처 체포팀과 대통령 경호처를 방불케 하는 치열한 대치(직원은 괜찮다는 듯 편히 대해 주었지만)를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클로징 시간이 되었다. 나는 죄송하다며, 폰을 껐다 켜고 있다고 설명하고, 침착하게 마지막 결제까지 마쳤다.

서점을 나올 때는 열 시 이 분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계단을 걸어올라 갈 즈음 문득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회상해 보니 조금 전까지 치열하게 전화번호를 찾아 포인트를 사용한 계정은 마감 날짜가 오늘까지이던 그 계정이 아니었다. 득달같이 문을 닫으려는 매장으로 달려가 직원들의 퇴근 시간까지 지연시키며, 오늘 꼭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포인트를 쓴 것이다.

서점이 소돔과 고모라 성은 아니었지만 이제 뒤를 돌아보면 안되었다. 지금부터는 오늘까지인 스타벅스 쿠폰을 쓰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복기는 거사가 다 끝나고 하면 되는 거니까. 나는 능숙한 CIA 요원처럼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바로 위층 스타벅스로 올라갔다.

아, 서점에 가기 전 스타벅스 유리 문 앞의 검은 안내판에 적힌 운영 시간을 슬쩍 보고는 서점으로 내려 갔던 터였다. 안내판을 보고는 긴 겨울방학이 온 것처럼 안도했다. 생각한 것과 다르게 그 매장은 열 시 반까지였다.



역시, 열시 반까지가 맞구나. 매장 안에는 아직 한창 손님이 많았다. 앞무려 삼십 분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었고, 그 사이 나는 음료 쿠폰 두 개만 쓰면 되는 것이었다. 이마에 맺힌 송골땀이 무안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여유롭게 자리를 잡고 카페 앱을 열었다. 그런데 남아있는 쿠폰의 갯수가 언듯 보고 생각해 두었던 것과 달랐다. 분명히 두 개였던 것 같은데. 오늘까지인 음료 쿠폰은 두 개가 아니라 세 개였다. 아.. 그래. 세 개, 이십 오 분. 주문하면 되지 뭐. 텀블러 두 개가 있으니, 하나는 테이크아웃 컵에 담아서 들고 가자.

아무렇지 않은 듯 카운터에 가서 차분히 첫번째 쿠폰을 사용하고, 준비해 온 텀블러를 내밀었다.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왔다가 앉기가 무섭게 금새 다시 일어났다. 베이커리 진열대 앞으로 가서 마침 유리장 안을 정리하고 있는 직원에게 소금빵을 하나 꺼내 달라고 해서 카운터 앞에 섰다.

음료 쿠폰으로 결제 되죠? 아.. 그거 작년 말까지 하고 종료했을 텐데.. 우선 한번 확인해 볼게요- 확인해 보더니 음료 쿠폰으로 빵을 교환할 수 있는 이벤트는 작년까지만 하고 끝났다고.

아 그럼.. 다시 생각해 보고 주문할게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아이스 오트 라테 그란데에 샷 두 개 추가를 텀블러(텀블러를 두개 챙겨왔다)에 담아 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두 개의 음료를 테이블에 올려 놓고 가방에서 칼바르트의 책을 꺼냈다.

먼저 주문한 아이스 커피를 스트로우로 쪽쪽 빨아 마시며 눈에 들어오는 둥 마는 둥 첫 챕터 첫 단락의 문장들을 애써 읽어보려 했다. 한쪽 뇌로는 시계를 체크하며 마감 오 분 전에 마지막 쿠폰을 써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책을 읽는 형식과 시늉이지 독서가 아니었다.

먼저 주문한 아이스 커피 벤티를 무슨 막걸리 마시듯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도 조금 남은 아이스 커피는 두 번째로 주문한 아이스 오트 라테가 담긴 텀블러의 남은 공간 위로, 마지막 얼음 한 조각까지 다 부었다.

곧이어(정말 곧이어) 문을 닫기 오 분 전이 되어 저벅저벅 다시 카운터로 걸어갔다. 방금 깨끗이 비운 벤티 사이즈의 플라스틱 텀블러를 내밀며, 바로 전에 주문한 옵션에서 샷 하나만 덜 추가한 아이스 오트 라테를 달라고 했다.

그렇게 아홉 시 반에 전격적으로 시작한 쿠폰 체포 작전은 공수처의 그것과 달리 대체로 성공으로 끝났다. 숨가쁘게 달려온 시간들이었다. 뱃속엔 과테말라 아이스 커피가 가득 차 물배로 출렁였고, 호흡은 거칠어졌으며, 내면은 벌레의 허물처럼 공허했다.

자본주의의 노예라기에 그것들은 너무나 소박한 경제적 활동들이었다. 소시민적인 알뜰함과 심리적 강박에 휩싸여 그렇게 했던. 그렇다고 잘 했다기에, 정직한 나의 자아의 상태는 부인할 수 없이 가볍고 천하게만 느껴졌다. 잘 했다. 하지만 잘못하고 있다. 뿌듯했다. 하지만 부끄러웠다.

껍데기, 껍데기. 쿠폰 껍데기. 포인트 껍데기. 마지막 쿠폰까지 작렬하게 다 쓴 그 순간, 재빨리 피부를 제외한 나의 질량의 무게를 쟀다면 0kg일 것이 틀림없었다. 열 시 삼십일 분이 되어 매장이 문을 잠궈 버리고 눈 앞에는 아직 유리 문 안으로 보이는 환한 스타벅스가 있어도 이제는 쿠폰을 쓸 수 없는 것처럼, 텀블러에 가득찬 음료와 쫀득이와 원두 드립백이 남은 대신, 나의 존재의 존엄성은 다 소진되어 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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