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가 좋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한석규 주연의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이하 이친배)를 보며 궁금해졌다. 연기에 대한 전공 지식이 전무한 내가 전문가의 식견에서 어떤 연기가 좋은 것인지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친배 속 남자 경장(프로파일러인 한석규의 소속 수사팀원으로, 한예리와 한 팀이었던 역할) 역할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분명했다. 참 재미있다 그의 연기는 한마디로 참 재미있었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다 좋았다. 그럼에도 유독 나의 눈에 남자 경장 역이 남은 것은 그의 역할이 유난히 살아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한 역도 빠짐없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연기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해진 연기의 틀 안에서 이뤄지며 흘러갔다. 캐릭터의 흐름..
때는 바야흐로 2005년. 나는 뜻밖에 한 달의 여정으로 스페인에 가게 된다. 캠퍼스 선교 동아리에서 단기선교를 가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정말 뜻깊었다. 가슴에 깊이 남은 것들이 정말 많다. 생의 지혜와 넓고 깊은 안목. 그처럼 보이지 않는 배움은 나를 어떤 식으로든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게 했다. 보이지 않는 감동과는 다르게, 보고 느끼는 감각의 감동은 표현하기 어려운 것으로 남았다. 공기나 바람, 그곳의 풍경과 냄새 같은 것은 아무런 사유를 거치지 않아도 고스란히 어떤 것을 몸에 남겼다. 보고 느낌으로서 그대로 남은 것들. 음식은 상상력을 불어넣는다. 열정, 자신감, 뜨거움, 사랑 같은 것 말이다. 그것들은 바닷가에 엎질러버린 원자력 폐기물이나 뚜껑이 열린 드럼통에서 줄줄 쏟아져버린 ..
2020년 4월 22일 씀. 현혹된 하루살이가 너, 촛불을 향해 날아들어, 따닥따닥 불타면서도 하는 말, “이 불길을 축복하자!” 제 예쁜 여자 위에 몸을 기울이고 헐떡거리는 애인은 제 무덤을 어루만지는 다 죽어 가는 환자 같아라. 만일 네가, — 비로드 눈의 요정이여, 율동이여, 향기여, 빛이여, 오 나의 유일한 여왕이여! — 세상을 덜 추악하게 하고, 순간순간을 덜 무겁게만 해 준다면? 보들레르, 중에서. 늦은 밤 지하철은 한가했다. 나는 Alexandre Tharaud가 연주하는 슈베르트 즉흥곡 3번을 듣고 있었다. 평범하고, 평화로운 귀갓길이었다. 일호선 지하철 막차는 승객이 너무나 없었다. 내 양 옆자리도 모두 비어 있었다. 듬성듬성 앉아있는 승객들은, 모두 마스크를 쓴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스..
배터리는 팔 프로밖에 없다. 나는 나의 방앗간에 있고, 하리보 젤리를 먹고 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힘든 날들을 보내기 시작한 이후로 가장 많은 비였다. 접이식 우산을 썼지만 바지 밑으로, 거의 치골 선 아래로는 다 젖었다. 엉덩이와 로퍼 안까지 축축해졌을 정도다. 김광민이 좋다. 역시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을 만큼 힘든 날이나, 비오는 날이나, 그 두가지가 겹친 날에는 김광민만한 것이 없다. https://open.spotify.com/track/5qs2kn2GzSlEc94bzmPTbW?si=hJqZBcH1QEG1W3QiIwxDUw Here`s That Rainy DayKim Kwang Min · Song · 2007open.spotify.com 좋은 소식 하나는 방에 에어콘을 달았다는 것이..
피씨방 일을 도와주던 어느날이었다. 할 줄 모르는 가족의 피씨방 일을 닥치듯이 이것저것 하고 있을 때였는데. 몇일 간 밤을 지새며 도왔던 날들 속에서 한 장면이 나의 마음 속에 깊숙이 남게 되었다. 에어콘이 세차게 돌아가는 서늘한 지하에서 피씨 방 일을 하다 보면 밖이 날씨가 어떤지, 지금이 몇 시인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잊고 어떤 암흑의 시간 속에 있게 된다. 몇 날을 해봐도 일은 손에 익숙해 지지 않았다. 마음은 분주하고, 작은 실수라도 하면 그 일을 잊지 못하고 다른 일에도 연달아 집중을 하지 못할 정도의 결벽증이 있던 나는, 그야말로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대단할 것 없는 그 일들에 임하고 있었다. 마음도 공간도 어두침침한 피씨방에서, 그렇게 나는 밤을 꼬박 지샜고, 바깥은 어느덧 광명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