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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영원의 기시감

newwing 2024. 11. 24. 05:51




2023년 11월 9일에 작성함.


“폴리에스테르 블라우스가 손짓했다.”



짙은 회색의 둥근 챙이 달린 모자. 하얀 일회용 마스크. 목의 높이가 낮은, 얇은 자주색 목폴라 티를 속에 받혀 입고 보라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폴리 블라우스를 위에 덧입으셨다. 그리고 모자가 달린 원색 빨간색의 잠바. 등산복 느낌의 폴리 소재 ​까만 바지. 그리고 안경을 안 써서 잘 못 보았지만 등산화 느낌의 운동화를 신으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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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선. 내가 선 자리 앞에 자리가 나자, 오른쪽 끝 좌석 쪽에 서 계셨던, 지긋한 노중년의 아저씨가 움직이려다가 나보고 앉으라고 손짓하신다. 나는 당연하게도, 괜찮다는 손짓으로 앉으시라고, 손바닥과 손목을 빈자리 쪽으로 열어 보이며 손짓했다.

그 사이에 아저씨가 원래 서 계셨던 오른쪽 끝자리에 자리가 났고, 내 뒤편에 있던 젊은 여학생이 재빨리 돌아서서 걸어가 앉았다. 퇴근 시간대의 인기 환승역이어서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유독 내가 선 곳 앞쪽에는 자리가 나지 않았고, 나는 아저씨가 서 계셨던 오른쪽으로 세 걸음쯤 성큼성큼 걸어가 섰다. 양보를 받은 사람의 바로 앞에 마주 서 있는 어색한 느낌을 피해서, 신경이 쓰이지 않을 만하면서 너무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라고 느껴지는 자리였다.

그렇게 포기하고 서 있는데, 앞에 앉아 있는 노년의 정겨운 아주머니가 손짓으로 내 뒤를 가리키신다. 오른쪽 끝 빈자리에 앉은 여자가 원래 서 있던 곳 앞자리에 자리가 비어 있었다. 고맙다고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고 천천히 돌아서 걸어갔다. 환승역에서 내리려는 사람들이 밀려 있을 뿐 더 이상의 경쟁자가 없는 한적한 상황에서, 나는 한가하게 걸어가 앉았다.

그렇게 여유롭고 정겹고 한적한 곳은, 흡사 ‘내 자리’처럼 여겨지는 곳이었다.

내 자리, 내 자리. 사실 나는 그 빨간 잠바 아주머니를 눈여겨보던 차였다. 처음 지하철을 타자마자 서 있던 좌석과 좌석 사이 공간에서 방향을 바꿔 돌아서 좌석 쪽 앞에 설 때부터 흘깃흘깃 아줌마를 바라보았다. 안경을 쓰지 않은 내 눈에, 엄마랑 얼핏 비슷한 느낌이 들어 그곳을 마음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우연히 아주머니 앞에 서게 되었는데. 아주머니가 꼭 엄마의 정겨운 손짓과 같은 손짓으로 저 자리에 가서 얼른 앉으라는 것이다. 헤드폰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라고 말씀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내 자리로, 어떤,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아주머니와 나는 이후에도 몇 번인가 시선이 마주쳤다. 그렇게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고 나서 몇 정거장 뒤 아주머니가 일어나 맞은편 출입문 앞에 서 계셨다. 그제야 아줌마의 옷차림을 세세히 기록해보고 싶어졌다. 메모장을 열었다. 짙은 회색의 둥근 챙이 달린 모자. 하얀 일회용 마스크. 자주색의 얇은 낮은 목폴라 티를 속에 받혀 입고 보라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폴리 블라우스….

아주머니의 손짓에서부터 등 뒤편의 빈 자리에 앉기까지의 시간. 그 짧은 순간을 지나며 나의 체온이 미세하게 달라져 있는 것 같았다. 어느새 찬 마음이 데펴져 있었다.

분명히 내가 서 있던 곳은 차가운 지하철이었는데. 이상한 기시감 같은 걸 느꼈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떤 애끓음이었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미온수와 같은 이 애끓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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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함께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극성스럽게 자리를 잡고는 일로 오라고 손짓을 하곤 하셨다. 나는 창피해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모른 체 하고는 했다. 엄마의 간절한 손짓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점강법적으로 승객들의 시선이 나에게 와 꽂히는 것이 느껴지고는 했다.

이상하게도 나의 마음속에서는 고약한 배알이 뒤틀려 엄마가 미워지곤 했다. 엄마로부터 멀리, 멀리 떠나가 무한한 감각으로 멀어지고 싶은 배알의 뒤틀림이었다. 방금까지도 엄마와 손을 잡고 따끈한 온기를 나누던. 훈훈하고 자랑스럽기만 했던 아들은 싸늘하게 차가워져,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가워지면서도 얼굴이 달아올라 울그락불그락해지고는 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고 마음 가득 흡족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그렇게 다층적인 감정 속에서 어디선가 자부심이 생겨나 왜인지 우쭐해지기도 했다.

나는 이상하게도 매섭고 매정했다. 지금 같으면 승객들의 눈총을 받으며 가방으로 자리를 잡아놓고 있는 엄마에게로 전속력으로 달려가 끌어안고 싶은데. 그 시간들만큼은. 그런 순간만큼은, 나는 정말 매정했다. 난 다 큰 어른이고 싶었다. 그 모든 것들을 느끼면서도 나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저 멀리서 손짓하는 엄마의 애끓음이 느껴져 속이 뜨거워지고는 했다. 엄마는 내가 다 커서 어엿한 소년이 되었다고 느낄 때까지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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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자꾸 끊기며 흘러나와 다른 노래로 옮겨 틀려고 다음 버튼, 다음 버튼을 누르려다 엄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나는 MarcAndré Hamelin의 Unrevealed Andante in E flat major와 이와이 슈운지 ost 등으로 이어지는 플리를 틀어 놓았다. 글을 쓰는 동안은 음악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목소리라면 온 세상을 다 넘겨주고도 끌어안고 싶은 소리인데. 엄마는 음악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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