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피
푸바오 팬을 조롱하는 현상에 대해서 본문
내가 공감하지 못한다고 독특성을 가진 타인의 감정을 비꼬고 조롱하는 것은 인간의 악한 본성이다.
한국에 오게 된 중국 판다곰의 스토리를 일체 팔로우업하지 못했다. 당연히 전혀 공감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감히 비웃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영상에 따라붙는 댓글들을 살폈다. 그런데 하나같이 현장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댓글을 주욱 내려 읽어가면서 내가 본 것은 군중의 폭력성이었다.
슬퍼할 만할 때만 슬퍼하라
그리고나서 내 마음을 살폈는데. 한낱 미물이라 여겨지는 곰을 향해 슬퍼하는 저토록 낯선 풍경을 바라보면서, 나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았다. 비웃음. 조소. 하나의 일사분란한 평가. 조지 오웰의 1984 속의,
일사분란하게 제한된 감정만을 공유하는 군중들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댓글들에 공감되기도 하다가, 한 방향성을가진 가히 천편일률적인 흐름을 보면서, 곧 오싹하고 끔찍해졌다. 미래 세계의 그로태스크한 한 단면을 엿본 것 같았다. 우리의 정신과 의식은 하나다. 마땅히 슬퍼할 만할 때만 슬퍼하라.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 같아서 아주 조금은 꼴뵈기 싫은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개인적이고 특수한 감정 아닌가. 나는 유치원을 졸업했고, 나의 감정은 나의 감정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친구의 낯선 생각이나 감정들에 대해 친구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기 전에, 내가 먼저 그의 감정을 정의하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굉장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초등학생 즈음에는 알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은 저마다 독특한 존재이고, 개별적으로 느끼는 감정들도 독특하다는 것. 내가 상식이라고 믿었던 나의 판단과 감정도 상대적이고 독특한 것일 수 있다는 것. 그 정도는 알고 사람을 대하고 댓글을 다는 것은 기본적인 교양이 아닌가.
riflier들 중에 그들의 개별적 감정의 사정을 잘 알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직접 알고 있는 친구가 아니라면 말이다. 어떤 헛헛함이나 결핍을 푸바오에게 위로받았을지. 푸석하고 힘든 생의 시간을 귀여운 아기 곰에게 투사해서라도 버텨야만 했을지 누가 아는가. 아니 이런 짐작도 자기중심적이고 편의적인 것으로, 쉽게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안도현 시인의 말(연탄재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처럼, 미처 우리가 그들 곁에서 아기 판다곰이 전해준 생의 뜨거움이 되어주지 못했다면 푸바오 팬들을 발로 차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나는 문득 저 오만하고, 오싹하고, 끔찍한 군중을 향해 돌아서고 싶어졌다. 사람들 참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군중의 익명성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슬픔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인간성보다 푸바오를 보며 순수한 감정으로 슬퍼하는 이들의 내면이 훨씬 아름답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https://youtu.be/NVTHEg460DI?si=xS45YqCv3rVFPH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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