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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한강

몇백 년 된 큰 나무 같은 곳 2024. 10. 15. 03:56

 

아들과 티를 마시며 조용히(quietly) 축하하려고 해요.

 



 

* 이 글은 에너지가 부족해서 쓰다가 말았어요 

 

 

1.
한강 작가의 ‘흰’을 가방에 넣고 맥도날드에 왔다. 작가의 책들이 몇 권 내게도 있다. 하지만 어딘가에 파묻혀 있어 도저히 찾아 읽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화장대에 앉아 눈으로 한 바퀴 쓱 돌아보고 안 보이면 포기할 생각이었다. 안경을 쓰고 왼쪽에서부터 돌아보려는데 놀랍게도 바로 정면 책장에 보란 듯이 꼽여 있는 그녀의 책이 보였다. 아마도 유일할 그녀의 하얀 책, 흰이었다.

노란 맥도날드에 앉아 흰을 펼쳐보았다. 첫 페이지가 이렇게 시작한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한 칸 띄고, 세로로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주욱 써 있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이어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일전에 사자마자 펼쳐보면서 나도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대로 책장을 덮어버렸다. 늘 그랬듯 한번 덮은 책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고, 기어이 그녀가 노벨상을 받고 나서야 펼쳐지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고통스럽다’는 표현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이따금 그녀가 쓴 글의 파편이나 출판사의 라이브 방송을 보면서 기괴하다고 느꼈다. 그녀의 문장이든 그녀 자체든. 말 그대로 *퀴어queer하다고 말이다.

무엇이 되었든지, 기괴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에게는 흥미 없는 무엇이라는 뜻에 다름 없었다. 나는 무엇이든 좋고 재밌고, 크거나 예쁘거나 아름답거나 성공한 것, 멋있는 것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영화라면 단연코 줄리아 로버츠가 나오는 헐리우드 로맨틱 코미디나 탐 크루즈가 나오는 드라마 류였고, 신발은 나이키, 축구는 독일, 교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님은 당연히 조용기 목사님을 좋아했다.

.
————
* 퀴어하다는 말은 내게는 문자 그대로 ‘특이하다(odd하다.)’는 뜻일 뿐이다. 조금도 젠더적인 의미가 아니다. 나는 현대적 성 담론에 하얗게 무지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쓰는 용어이기 때문에 젠더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말은 신뢰해도 좋다.

2.
맥도날드에 앉아 글렌 굴드를 들으며 주문도 하지 않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는 남자. 이 남자 자체도 이상하지만, 이 남자보다 이상한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이 남자의 생도 이상하고, 세상도 이상하고, 한강도 이상하고,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탔다는 소식도 이상했다.

이상하다고 느낀 예술가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좋아한 이는 글렌 굴드였다. 그의 연주는 완전히 퀴어했다. 일전에도 유명한 연주자들의 바흐를 들으며 좋아했고, 나름대로 바흐를 안다고 생각했지만(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다), 굴드의 바흐는 전혀 다른 바흐였다. 바흐의 새로운 해석 같기도, 바흐가 아닌 것 같기도, 가장 바흐적인 것 같기도, 바흐 자체 같기도 했다.

3.
무료했던 신대원 시절. 군포의 학교 주변에는 재밌는 것도 맛있는 것도 거의 없었다. 호기롭게 기숙사에 들어갔지만 정말 미칠 것 같았다. 학교와 군포시가 협력해 세상과 구별된 성직자를 만들어내려고 학교 주변을 노잼 마을로 조성한 것이 아닐까-하는 지경까지 할일 없는 나의 상상력이 미칠 정도로, 밤이 되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동네였다.

그날도 그 재미없는 선지동산에 고립되어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엉뚱하게도 나의 공허함이 삐져 나간 곳은 바흐였다. 캄캄한 기숙사 방의 2층 침대 위에서 난데없이 싸이월드 뮤직에 들어가 바흐 음악들을 쥐잡듯이 찾았다. 바흐의 멱살을 잡고 끌고 와 피아노 옆에 세워 놓고 피아노들을 다 분해해버릴 기세로 연주곡들을 찾다가 우연히 글렌 굴드를 발견했다.

그렇게, 십자가 사건처럼 영단번에 글렌 굴드에게 빠져들었다. 귀에 유선 이어폰을 꽉 꼽고, 움직일 때마다 삐그덕 소리가 나는 이층 침대 위에서 조심스레 몸을 뒤집어가면서 밤새 들었다. 기숙사가 더웠는지 손에도 땀이 쥐어지고 몸에도 흠뻑 땀이 났다.

지금이나 그때나 클린이인 나는 가장 유명한 곡들이라고 할 수 있는 평균율 프렐류드 1번과 골드베르크 변주곡 등을 집중적으로 들었다(굴드는 설마 그 좋은 G선상의 아리아를 아예 연주하지 않은 걸까). 걸을 때마다 짤짤이 소리가 나는 주머니 사정에도 한 곡에 몇백 원씩 하던 굴드의 연주곡들을 과감하게 하나씩 결제해 나가면서, 곱씹어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동이 틀 무렵. 마침내 내가 바흐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각성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4.
굴드의 레코딩 음반에는 연주하면서 선율을 따라 부르는 그의 기괴한 허밍 소리가 그대로 섞여 있는데 엔지니어가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영상 자료가 귀할 때였고, 나는 미처 그의 연주 영상까지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생각해 보니 음악의 본질인 ‘소리’만으로 매료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훗날 그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는 반쯤, 아니 완전히 정신이 나가있는 것 같았다. 바흐에 관한 한 독보적인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은 지금도, 그는 극단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피아니스트인 것으로 안다. 고상하고 전통적인 독일 귀족풍의 바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이 독특한 캐나다인의 연주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듣다가 나도 질려서 더는 글렌 굴드를 듣지 않게 되었다. 꼭 굴드가 아니어도 들을 바흐 연주곡은 많았다. 하지만 여전히 요요마나 미샤 마이스키나 안드라스 쉬프 정도를 맴돌 뿐이었다. 이후 바흐를 끊기도 했고 다시 들어 나가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임윤찬의 스승인 손민수가 좋았고, 비킹구르 올라프손과 마틴 슈타트펠트의 곡 해석과 연주가 무척 흥미롭다고 느끼는 지점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굴드 이후 ‘좋았던 기괴함’은 일체 없었다. 다른 연주자들은 더 낫고 못함이 있었지만 굴드는 아예 다른 공기 속에 있었다. 어떤 연주자도 글렌 굴드만큼 기괴하지는 않았다.

그의 오드odd함은 실은 이미 오디너리ordinary가 된 지 한참이었다. 오디너리를 넘어 클래식이 되었는데도, 반 세기가 다 되도록 그를 넘어서는 바흐 연주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글렌 굴드를, 그것이 아니라면 그의 미쳐있음을 잊지 못했고, 한참 후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5.
앞서 말했듯 나는 젠더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따라서 기괴함이란 말도 젠더와 상관없이 사용한다. 그럼에도 기괴함의 성질 자체에 어떤 성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글렌 굴드는 남성적인 퀴어함을 가진 피아니스트라면 한강은 적어도 중성적이거나, 아니면 매우 여성적인 퀴어함을 가진 작가 같았다. 나는 남성적인 퀴어함만 알았고, 좋아했는데.

한강이 맨부커 상을 받았을 때조차 나는 그녀를 마음껏 좋아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작가로서의 한강은 흥미로웠지만, 그녀가 속삭이는 가녀린 목소리와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작품성도 있다고 알려진 김영하나 김중혁이나 김훈이 읽고 싶었다. 여성 작가라면 애거서 크리스티가 가장 궁금했고, 그래도 박완서 선생의 작품들은 하나씩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수도를 하는 셈 치고 박경리의 토지를 읽을 의사가 있을지언정 한강의 책에는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았다.

그녀의 묘한 힘 없음과 창백함, 기괴함 같은 것은 나에게 흥미로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야기의 본질에 관한 것들이 아니라 다 순전히 이미지나 분위기일 뿐이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무릇 작가라면 글뿐 아니라 사람 자체가 주는 매력도 중요했다.

나는 왠만하면 남성 작가들의 글을 읽고 싶어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무의식 중에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무의식 중에‘라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여성 작가라면 신간 북토크 등의 자리에서 밝게 말하고 매력있게 웃음 짓는 젊은 여성 작가들이 좋았다. 글과 사람 모두 매력이 있는 문보영, 젊고 대중적인 여성 독자 층이 많이 찾아 읽을 것 같은 이슬아, 윤고은, 정세랑 같은 작가들 말이다.

한강은 중년이었고 우울했다. 518을 다뤘고, 난해하게 시적이었다. 최근작의 모티브는 제주 43에 관한 환상(자신이 구약성서의 예언자라도 된양 꿈속에서 보았다는)이었다. 내 삶도 이상하고 무거운데 한강까지.

이건 아니었다. 자신도 없었고. 그녀의 모든 것은 도저히 소구되고 소화될 수 없는 무엇 같았다. 세계적인 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뺀다면 그녀에 관한 것은 죄다 이상하거나 싫어하는 것들 뿐이었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채식주의자 역시 고기뷔페 주의자인 나와는 상관 없는 무엇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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