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길이 안정이냐 고됨이냐의 갈림길은 있어도 성공이나 성취 같은 것은 없다는 점에서 음악가나 수영 선수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고 믿는데. 이곳에도 왕왕 실패는 있다는 것을 배운다. 믿음의 선배님들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말이다. 부끄럽게 살면 학문적인 글을 통해서나 포디움에서 했던 말들이 빛이 바라고 모든 수고가 수포가 된다는 오싹한 교훈을 마음에 새겨본다. 어쩌면 연예인 못지 않게 높은 윤리적 기준이 적용되는 분야인데 현실은 자본주의 사회의 여느 사인 못지 않게 이중적이거나 방만해도 괜찮은, 아니 어느정도는 그래야 자리를 보전받기도 하는 악의 역치가 있는 세계인 모양이다. 가장 고고하고 순전해야 할 필드에서.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없다. #서울신학대학교 https://www.newsnjoy..
이전에 썼던 글을 티스토리에 좀 옮고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2022. 02. 19. 브런치.) 발톱을 한동안 좀 오래 안 잘랐더니 발톱 끝이 살 안 쪽으로 파고 들었다. 두껍고 몽톡한 발톱이 손톱깍이로 자르기도 어려울 만큼 구석까지 파고 들었다. 아팠다. 너무 오래 자르지 않았다. 문제가 되어 버렸다. 난해한 문제. 문제에 대해, 아니 문제 자체가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문제는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프레임이었다. 문제를 문제시하지 않고 당연히 여기며, 그것을 이해해야 겠다는 관점을 가지면 어떨까. 스스로, 자신에게 설득하고 싶어졌다. 웰컴 투 earth. 갈등의 숲에서 살아가는 것은 모든 지구인의 숙명이다. 무중력 상태의 우주에..
조지 클로젠 ‘학생’ 1908년경. (우지현, ‘나의 사적인 그림’ 중에서.) A 삶은 하나의 대비이다. 빛 뒤의 밑그림으로써 어둠이 없었다면 빛은 완전히 빛나는 것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둠은 조연이고 빛은 주인공이라는 뜻은 아니다. 어둠은 스크린이고 빛은 어둠 위로 투사(projection)된 것이라는, 명암의 주main조helping의 관점은 사람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을 억지스러운 건전가요처럼 만들어버린다. 삶을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바라보고 그것의 입체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이야기를 잡아 끌어내려 잘 드러나지 않는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어둠의 중력을 가볍게 볼 수 없게 된다. 어둠은 빛의 조연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무엇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관점을..
1 널 어떡하지. 실로 오랜만에 증명사진이란 것을 찍었다. 분명히 아까 전화에서 몇 년 전 사진 그냥 써도 된다고 했는데 혼자 죄책감이 들어서 괴로워하던 중, 집 앞 찻길을 걸어가다 갑자기 사진관에 뛰어들어갔다. 아마 열몇 번은 찍었을 것이다. 사진사가 계속 이렇게 저렇게 자세와 표정에 관해 안내를 해주었지만, 내가 너무 긴장을 하는 것이다. 계속 코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