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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널 어떡하지.

실로 오랜만에 증명사진이란 것을 찍었다. 분명히 아까 전화에서 몇 년 전 사진 그냥 써도 된다고 했는데 혼자 죄책감이 들어서 괴로워하던 중, 집 앞 찻길을 걸어가다 갑자기 사진관에 뛰어들어갔다. 아마 열몇 번은 찍었을 것이다. 사진사가 계속 이렇게 저렇게 자세와 표정에 관해 안내를 해주었지만, 내가 너무 긴장을 하는 것이다. 계속 코밑이 간지럽고, 마음도 잘 잡히지 않고 그냥 이 순간아 빨리 지나가기만 해라 하면서 어쨌든 1차 촬영을 마쳤다. 1차라 함은 2차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고 바로 컴퓨터 앞에서 내 얼굴을 보았는데, 맙소사.

“널 어떡하지.”

스마트폰 사진이 아닌 고화질 카메라로 찍은 무보정 원본 명함 사진은 참혹한 것이었다. 자세는 구부정하고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다. 안경을 벗고 자신있게 찍은 나의 생눈은 너무 음울하고, 흐리멍덩하고, 작았다. 야생에서 혼자 숨어 지내던 늑대 인간을 포획해 셔츠를 입히고 팡, 팡, 사진을 찍으면 이런 모습일까.

늘상 집에 있는 화장대 거울로만 슥삭 보았던 나의 얼굴과 표정은 알고보니 사실, 한 겨울의 만주 벌판처럼 황량한 것이었다. 괴로워보이는 한 성인 남성이 크나큰 컴퓨터 모니터 속에 있었다. 그는 삭막하고 생기 없는 야생의 눈빛으로, 이게다뭐지-피곤하다-사진관에빈방이라도있으면들어가서잠이나자고싶다 하는 표정을 지으며 카메라 렌즈를 째려보고 있었다. 아찔한 내 눈빛과 얼굴과 피부. 널 어떡하지.

고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수라장인 내 얼굴을 보며 바로 다시 찍겠다고 했다. 드라이로 말을 듣지 않는 머리를 어떻게든 다듬어보려 애썼다. 안경도 썼다. 그렇게 나온 사진은 이제 표정이나 자세나 눈빛이나, 조금은 문명인의 태가 났다.



2
잘 왔다.

사진관에 잘 왔다고 생각했다. 나를 봤다. 무보정 사진을 보며 놀랍도록 긴장하고 초조해 하고 불안해 하고 경직되어 있는 내 영혼을 똑똑히 보았다. 아무리 괜찮아, 자신에게 속삭이며, 나는 편안하다 관대하다 내게 강 같은 평화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도 사진은 정직했다. 플래시가 터진 고화질 사진에서 불안해 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영혼이 포획되었다. 짙은 새벽녘 산기슭에서 잡힌 야생 멧돼지룰 보는 것 같았다.

사진 속 남자의 눈빛에는 오지 탐험가의 사진기 플래쉬에 번쩍 반사된 야생 동물의 눈빛이 담겨 있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그 야생 동물은 오들오들 떨며 무언가, 잔뜩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한 겨울 추위에, 배를 주리며 가파른 산기슭을 홀로 정신 나간 것처럼 뛰어다니고 있던 나의 영혼의 멧돼지에게.

너 괜찮니. 정말 괜찮은 거니. 한번 울어야 하는 거 아니니. 어디 조용한 곳에서 엉엉 소리 내 울든지 절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니. 너무 어두워져 있는 것이다. 내가. 내 영혼이. 숨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작고 흐리멍덩한 내 눈. 몸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고 사진을 보정하면 영혼도 톤 업이 되고 활기 있고 밝게 보정이 되는 걸까.

바쁘게 누굴 만나고. 깊고 통찰력 있는 대화를 하고. 욕망을 사랑으로 치장하고. 위신을 세우고. 성취를 하고. 너 그렇게 살려고 그렇게 버둥버둥 낑낑 애쓰고 고집부리고 씨름했니. 뭐 좀 근사한 일 좀 하려고. 그렇게 한 자리 차지하고 뭐라도 돼보려고. 다 집어치워라.

이렇게 요가 박스 같은 작은 마음에 영혼을 가두고 살 거면, 구부정하고 갇히고 막히고 만신창이인 마음으로 살 거면 다 때려치워 버리고. 이 괴물 같은 레고 탑 다 쓰러트려 버리고. 그냥 좀 멍하니 있을 줄이라도 알아봐. 온종일, 아니 며칠, 몇 달, 몇 년이라도 멍하니 있어 보는 거야.

허둥지둥 초점 없는 눈으로 손과 발만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이지 말고, 바람에 실려 오는 하나님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 보는 거야. 그러다가 지루해서 참지 못하겠으면 성서를 들춰봐 봐. 고동 껍질에 귀를 대고 네 영혼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봐. 이런 생각들이 전자레인지에서 삼분을 넘긴 팝콘처럼 팡팡, 계속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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