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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클로젠 ‘학생’ 1908년경.
(우지현, ‘나의 사적인 그림’ 중에서.)




A

삶은 하나의 대비이다. 빛 뒤의 밑그림으로써 어둠이 없었다면 빛은 완전히 빛나는 것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둠은 조연이고 빛은 주인공이라는 뜻은 아니다. 어둠은 스크린이고 빛은 어둠 위로 투사(projection)된 것이라는, 명암의 주main조helping의 관점은 사람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을 억지스러운 건전가요처럼 만들어버린다.


삶을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바라보고 그것의 입체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이야기를 잡아 끌어내려 잘 드러나지 않는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어둠의 중력을 가볍게 볼 수 없게 된다. 어둠은 빛의 조연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무엇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관점을 얻게 된다.


빛을 하나의 현상이자 결과로써 본다면, 어둠은 그것의 원인cause이 되기도 하고 과정process이 되기도 하는 것으로써, 오히려 주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때에 빛은 ‘그래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어요.’라는 피상적 결론에 가까운 것이 되고, 어둠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신비가 된다.


지상의 빛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설정하면, 깊고 어두운 지하의 세계는 기피의 장소가 되지만, 어둠을 이야기의 주무대로 옮겨 볼 수 있는 깊이를 가지게 되면 이제 평화롭고 따분한 지상의 명랑성 따위에는 관심이 거의 가지 않게 된다.



B

어둠과 빛. 절망과 희망. 기쁨과 슬픔. 이제 와 보니 그것들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의 몸체를 가진 것이었다. 배고픔이나 한숨이나 눈물이나, 괴로움이나, 불안과 초조함. 다 아름답고, 숭고한 순간들이다.


그동안 말로, 글로만 숙고하던 신학적 상상들이, 몸으로 옮겨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삶의 실존 한 가운데 있으니, 비로소 변증법적 신학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믿음이란 절망인 동시에 희망이고, 어둠인 동시에 빛이고, 죽음인 동시에 부활이라고 시인처럼, 목사처럼 노래했던 신학자들의 언어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스며드는 것 같다.


어쩌면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어른이, 또는 크리스천이 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고흐도 조금씩 눈에 들어오고, 커피도 좀 알겠고, 클래식도 조금씩 더 달게 들린다.



C

예술은 하나의 파토스(pathos)의 세계 속으로 대담하게 걸어 들어가는 일인 것 같다. 암흑이기도 하고, 빛이기도 한, 한 점 한 점 그림 속으로, 하나의 음악 속으로 맨손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예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예술적 순간이란 차갑게 젖은 몸으로, 기꺼이 인간의 고통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며 흥얼거리거나, 붓질을 하는 순간들이다. 예술은 미답의 어둠 속으로 두려움 없이 달려들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예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고, 인생을, 사람을,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D

어린 아이처럼 희망하는, 단순한 희망은 희망이 되지 못한다. 단순하고 선명한 희망은 너무나 결정적이고 중요한 희망이지만, 인간의 바람에서, 그것의 한계에 갇혀 있는 단순한 희망은 전체의 희망의 한 부분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한다면, 특히 그것에만 집중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되지 못하고, 그것은 원작에 대한 하나의 편집이 된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편집된 희망은 기독교가 되지 못한다. 다만 어떤 사람이나 경험과 지성의 어떤 지점에 서서, 부분을 이야기할 수 있고, 부분을 이야기 할 때는 그것이 부분임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최대한 전체와 궁극을 지향하고는 있어야 하고, 한 부분을 전할 수밖에 없을 때나, 그것을 강조해 전하고 싶을 때는 그것이 아직 전체는 아님도 뚜렷히 밝혀야 한다.


스피커는 지성적, 영성적으로 엄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전체를 볼 수 있을 때까지는 보는 만큼만 이야기해야 한다. 종교인에게든 예술인에게든 지성적 정직함이 없다면 신뢰를 줄 수 없다. 특히, 종교인에게 거짓은 하나의 질병과 같은 것이 된다.


환자가 자신이 환자라는 것을 모른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앵무새처럼 민간치료법을 말하며 치료가 아니라 질병을 옮긴다. 진리에 관한 일은 열의로 달려들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신앙인이나 종교인에게 정직함은 목숨과도 바꿀 수없는 것이어야 한다.


엷고 위태롭고 명랑한 희망에 머무는 기독교. 뜨거운 희망까지 닿지 못하는 기독교. 교회나 선교지의 현장에서 몸을 담그고 있으면서 점점 그런 지점들을 느끼기 시작했다. 선교사는 홀로로서의 존재로 승부를 볼 실력이 되지 못했다. 사역을 장로, 권사의 물질로 해결하려는 듯 했고, 성령에 대한 이해는 능력에만 치중되어 있어 사람들을 잔뜩 모아서 드리는 예배가 말도 할 수 없이 끔찍했다. 개인 대 개인으로는 아무 영향도 줄 수 없어, 중요한 교감의 자리는 넉살과 권위로 메웠다. 자신도 한계를 아는 듯 무력하고 무료해 보였다. 그렇게 행정가 노릇만 하는데 사람들은 정겨운 교회 문화 속에서 꼬박꼬박 존중과 존경을 표해야만 했다.


그럴 때면 가지고 있던 작은 열정의 풍선에서마저 김이 빠지는 듯 했다. 헤어질 때가 이미 지났는데도 맛있다, 다음에는어디 갈까, 의미없는 말만 주고 받으며 마주 앉아 있는 연인처럼 지난한 시간들.


그렇게 단순한 기독교에서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게 되었다. 유치원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이 갤러리에 걸리고, 면허증만 겨우 획득한 의사가 수술을 하고, 종교인의 자격증만 가진 사람들이 궁극적인 희망의 근처에도 닿지 못하는 말을 했다. 모르면 모른다고, 몇 년을 공부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한 마디 하고 내려왔으면 차라리 감동적이었을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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