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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재능은 ’괜찮아‘의 자유 속에서 꽃피운다.




1.
들풀이 꽃을 피우려면 바람, 햇살, 물이 필요하다. 푸설푸설한 흙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홀로 자취하면서 화분을 몇 개 샀었다. 그중 두 개는 꽃이 화려하게 핀 화분이었는데. 유난히 매혹적이었던 백리향은 일주일 남짓 있다가 꽃이 죄다 져버렸다. 그러다 몇 주가 더 지나면서 풀도 다 말라 사라져버렸다.

나머지 화분은 왠만해서는 시들지 않는 선인장 과의 화분이었다. 그 화분도 몇 주 정도 지나면서 꽃이 다 져버렸다. 하지만 선인장 과답게 줄기는 여전히 남아있는데. 그래도 어딘지 늘 허전했다. 처음부터 꽃이 없었다면 모를까, 있던 꽃이 지고 풀만 있으니. 오매불망 다시 꽃이 피기를 바라며 발코니와 거실, 화장실 창가와 방안을 왕복 운반하며 물도 열심히 줘 보았지만. 화분은 묵묵부담, 꽃 한 송이 피지 않았다.

그렇게 자취생활을 하던 2년 내 꽃을 피우지 않았다. 나의 집으로 돌아오며, 화분들을 지하실 형님께 드리거나, 버릴까 나름 치열하게 고민했었다. 이삿짐도 많은데 꽃도 안 피는 풀잎 화분, 확 버려 버릴까. 그러다 결정도 제대로 못한 채 이사 스케줄에 쫓겨 그냥 어부지리로 실어와 옥상에 내놓았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내놓았던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며칠만에 작은 꽃몽우리들이 터지더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발코니에서 아무리 곁볕을 쐬게 하고, 정성껏 물을 주어도 꿈쩍도 하지 않더니. 바깥에 내놓기만 했을 뿐인데, 기다렸다는 듯이 꽃 몽우리를 밀어올리더니. 그렇게 금방, 활짝 꽃피는 것이다.

만개하거나 피어오르는 중인 꽃 방울의 색깔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신비롭던지. 수십 개의 꽃송이들이 어느덧 그렇게 화분을 가득 채웠다.  



2.
”재능을 꽃피우려면 괜찮아-의 자유가 필요해.“

오전에 봉사하는 교회 말고도, 늘 관계를 유지하는 교회가 있다. 이즈음은 그렇게 주일이면 두 개의 교회를 다녔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학교나 회사, 어떤 기관들이 다 그렇듯이 두 곳 모두 처음에는 예절을 잘 지키려 노력했다. 깔끔한 예절과, 사람 좋음. 대체로(?) 좋은 ‘이미지image’를 유지했다.

좋은 이미지라 봐야 실은 별 것 없었을 것이다.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한편 원하는 것들을 지켜주는 것이었을 터다.

이 지점부터 자신도 잘 이해하지 나의 독특한 점이 드러나는데. 그러다 이상하게 나는 조금씩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해도 되는지 실험해 보기 시작했다. 실험이라고 했지만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편해지니까 관계적인 신경의 치밀함과 예민함이 느슨해지고, 편해지면서 나의 연약함이 더 극단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달까. 누구나 그렇듯이 자연 상태의 모습 중에 좋은 면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인간이란 구제불능의 죄인이란 신학적 전제를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 과정에는 의도한 바와 의도하지 않은 바가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바, 그러니까 나의 무의식의 비율이 훨씬 더 지배적이었다고 해야 겠다. 나의 의식은 늘 잘 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해 말하자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잘못했다. 하지만 잘했다.



3.
의식있는 나의 자아가 이성으로서 결정하고 행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의식은 의도적으로 그랬을 수 있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은 의식보다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본질에 더 가까우며, 전자는 후자보다 훨씬 더 깊고 넓으니까 말이다. 또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세계가 있었을 것이다. 또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꼬여버리면서 의식이 냉담해지며 어느 정도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게 되는 일들의 세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일들이 어린 시절의 땅따먹기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내 땅을 많이 빠앗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즉 영토territory를 더 많이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토와 타인의 영토를 자유롭게 왕래하고 넘나들며, 종국에는 나의 영토를 내주고 싶은 대상을 간절히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의 무의식은 차츰.. ‘그래도 되는지 게임’을 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드러난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미리 가볼 수 있었던 어떤 한계 같은 것이었다. 가보지 않고도 미리 가보며 끝을 알 수 있었으니 그것은 잘 한 일이었다. 소금쟁이처럼 작은 나는 바다인지 연못인지, 강인지 냇물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똑같이 죄인으로서의 인간이었다. 이게 뭐지. 이게 다 뭐지. 하나님의 교회는커녕 인간의 교회라고 해도 좋은 것인지조차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경험들이 누적되었다. 인간의 교회는 아무래도 어색했다. 그냥 인간의 인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신적인 이해와 사랑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 무한한 포용성에 대한 진지함이나 각오가 없다면, 그냥 사람들, 또는 사람의 회합, 회중(congregation)이라고 하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서로 부담 없었을 텐데. 굳이 혹부리처럼 '교회(church)'라는 무거운 부연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게 해도 좋은 것일까- 하는 상념에 젖어들곤 했다.



4.
통번역일도 하고, 연예인 활동도 하던 모 여자 방송인(A)이 남편(B)과 헤어지면서 팬들의 축하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워 조금 팔로우 업 해보게 되었다.

언제나 보이는 게 다는 아니란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방송분을 보면 확실히 A는 사랑받지 못하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B에게는 총각 때처럼 여전히 자유가 중요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 B의 수준에서는 A도 어쩌면 자기의 자유 안에서 욕망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욕망은 다른 것이다. 사랑은 기꺼이 자기를 다 소진할 수 있을만큼 상대를 아껴주는 것이고, 욕망은 자기도 상대도 보전하려는 마음이다. 아니지. 자기를 위해 상대를 보전하려는 마음이다. B의 태도를 볼 때 후자의 마음으로 A와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연인을 찾는 일은 자기를 다 소진시키고 싶은 대상을 찾는 것이다. B는 A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 한편, 자기의 자유는 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진정한 사랑이었다면 거꾸로여야 했는데 말이다. A는 유능한 방송인이었고, B보다 스무 배쯤은 더 똑똑한 여자였다. A는 도망쳐야 했다.



5.
사람은 꽃과도 같아, 그의 잠재력과 재능은 괜찮아-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품에서 꽃피운다. 계율의 품에서 꽃은 피어나지 않는다. 나무도 풀도 꽃도. 그리고 사람의 내면 안의 꽃도 자유로운 바람이 부는 곳에서 피어날 수 있다. 누군가를, 마침내 화려하게 꽃피우게 하는 것.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

사람에게는 절대자가 필요하거나, 절대자처럼 자기를 사랑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누가 되었든 완전한 사랑의 지지자가 말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절대자에게 그러한 역할을 기대해야지 사람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며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를 신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사람은 오직 사랑을 주는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자기의 책임을 외면하고, 사람들에게 신적인 매개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동시에 책임과 의무와 관념만 부각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하나의 종교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무한한 사랑과 영광의 존재를, 섬기는 우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규율로, 종교로, 질서로 말이다.

(그러나 신과 사람의 은밀한 교제도 예배도, 오직 신과 인간 상호 간의 무한한 자유 속에만 이뤄질 수 있다. 삼위일체 용어처럼 페리코레시스-일종의 자유로운 강강수월레의 그림-의 모습으로 말이다. 부모를 기쁘게 해주겠다고 양손의 검지손가락으로 한살배기 아이의 입을 찢어 웃어 보이게 하는 어리숙한 보모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부모는 그 보모를 향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자가 전적인 사랑을 주는가(사랑하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현실이다. 사역자는 사역의 대상인 또 다른 신자나 비신자를 다분히 신념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다(사람은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도그마는 그러면서 교묘하게 자신이 신적인 사랑의 대리자가 되어주지 못할 경우의 피할 요새로 활용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부정직하고 교활한 마음이다.).



6.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처럼 자기를 사랑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사람은 서로 그 신적인 사랑을 매개해줄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기대해야 하고, 그럴 수 있으며, 마땅히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절대자를 믿지 않아 그를 곁에 둘 수 없었다면, 그 성사를 대신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의 대상일 뿐 아니라, 절대적 사랑의 공급자가 될 수도 있어야 한다. 성서가 말씀하는 바 '장성하여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사랑과 믿음(신뢰)의 대리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 사랑은 억척스럽다. 억척스럽게. 악착같이. 극성스럽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하는 사랑이다. 내가 홀로 떨고 있을 때, 나를 누군가가 부둥켜 얼싸안고, 세상의 모든 손가락질을 다 막으며,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공간에서. 시간에서. 누군가의 품에서 오직 하나님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 외의 모든 계율과 계도, 계몽은 또 하나의 세속 종교일 뿐 기독교도 개신교도 그리스도교도, 어떤 진리도 아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면 사랑이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내가 너를 안다고, 우리는 함께라고, 하나라고. 신앙이라고, 교회라고, 믿음이라고. 우리는 기독교인이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눈이 부신 하나님의 실존을 직면한 성서 속의 인물들이 그랬듯이, 성Holiness에 속한 숭고한 성질 앞에서 우리는 겸양해야 한다.

사랑을 전해줄 수 없으면 종교라도 가르쳐 줘여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랑을 전해줄 수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침묵하고 가만히 있어, 그가 자유롭게 꽃 피우게 놔둬야 한다. 차선의 사랑이란 것이 있다면, 바로 그처럼 소극적 태도로서라도 말없이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7.
사랑인지 욕망인지. 신앙인지 신념인지. 손님인지 가족인지, 집인지, 자취집인지. 그런 것들을 구별할 필요도 없이 충만했던 나는 왜인지.. 그러한 감각들에 대해 예민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구별할 어떤 필요마저 절실히 느끼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감각과 사유는 어떤 식으로든 유용하게 사용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민함은 고유함이니까. 그것은 열기이고 에너지니까. 그것은 자기만의 빛과 빛깔의 배경색이나 에너지원이 되니까. 나는 그 추진원으로 그렇게 나아가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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