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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기운에 스산하니까 더 외로운데 ㅠ 살려주세요. 저는 카페에서는 거의 벙어리처럼 구경만 했는데도 피곤이 몰려와서 곯아떨어졌어요.
(지인에게 보낸 카톡)
외로움이 너무 밀려왔다.
사역일지
전도사로서 정식 계약하고 ’출범‘한 것은 아니니까 전도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도사가 아닌 것도 아닌 채 그렇게 서울의 한 개척 교회에서 작고 작은 둥지를 튼 지 7개월 여가 흐른 것 같다.
어제 첫/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청년 모임을 했다. 목사님께 건의드려 하게 된 교제 모임이었다. 교회의 특징이나 분위기상 아마 그들과는 전혀 달랐을, 어떤 독특한 경험과 신학적 삶의 궤적을 가진 나로서는 이 모임을 개최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다시 다루기로 한다.
스타벅스 닉네임이 김전도사인지는 거의 10년이 된 것 같은데. 나를 '전도사님'이라고 부르는 아이들과 사적으로 대면하고, 모임을 가진 것은 처음이었다. 주문을 하기 위해서는 묵묵히 일하는 삽십 대 남자 사장님이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떡볶이집에서 즉석 떡볶이를 먹고 카페에 가는. 아주 흔하고 쉽고 가벼운. 주말 저녁의 모임이었다. 적어도 네 아이들에게는 그랬을 것이다.
박력있게 건의를 하고, 다짜고짜 모임을 잡고 공지를 하고도 몸과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냥 편한 마음이 아니라 신학적인 마음으로 영혼을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이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왜인지 무겁게 다가오기만 했다. 낯선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고 큰 신학적 방향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이 삶이 무거웠다. 이제는 출발해야 한다. 소년인 채 울고 있는 한 아이를 달래 약간의 여유를 두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어떤 약속에 시간에 맞춰 만나는 것을 힘들어 했는데. 그런 흐름이 오늘날 처음 청년들을 만나는 떡볶이집으로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물론 예상하지 못한 변수(나로서는 이겨내기가 무척 힘든 일이었던)가 작용한 탓이기는 했지만. 광인처럼 자전거를 구르며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첩첩산중,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작은 벽을 뛰어넘는 일도 복잡한 난관이 많은 것일까.
도착하자 세 명의 아이들이 적막함 속에서 앉아 있었다. 남자 아이들 둘이 왼쪽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고 여자 아이 혼자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남방 등에 땀이 흥건하게 베었고, 얼굴에서는 자꾸만 흘러내려 눈을 찌르는 썬크림이 땀과 범벅이 되어, 얼굴과 표정이 아수라장이었다. 30분에 만나자고 단체 톡을 하고 도착한 시간이 얼추 36분은 되었을 것이다.
무심함(남자 아이들)과 반가움(여자 아이)과 원망(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이 뒤섞인 공기가 느껴졌다. 분명히 씻고 여유있게 준비를 하고 누워 있었는데. 그렇게 나가려는데 모종의 변수가 생겼다. 예상하지 못했지만 일어나야만 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물론 예상할 수도 있었는데. 설마 설마 하던 일들이 역시, 기어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예측불가한 동시에 예측가능한(예측불가한 일이 예측가능하게 일어나는) 삶이 무척 신비로웠다.
이런 삶이 정말 싫다. 동시에 좋다. 덕분에 나는 어떤 구석의 삶들을 빼곡히 히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주 가벼운 일을 하는 것도 결코 가볍게 되지 않는 인생이 있다는 것을. 역기능 가정의 굴레에 갇혀 살아가는 젊은이들이라든지, ADHD라든지, 트라우마라든지, 강박증으로 어려움을 겪고 죄책감이나 비난과 혹평에 시달리는 어떤 삶들을 말이다.
평일에는 핏이 달라붙는 정장을 입고 빌딩 숲을 누비며 한손에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귀로 어깨 위에 올린 전화기를 눌러서 받으며 힘차게 앞으로 앞으로만 걸어나가며 살다가, 토요일에는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맞으며 까맣고 섹시하게 그을린 피부로 서핑을 즐기며 살아가는 쿨남이기를 바랐는데. 평일에는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살아가고, 주말에는 누구나 즐기는 평범한 것들을 누구보다 빽빽하게 즐기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누구나 하는 것도 잘 하지 못하고, 누구나 즐기는 것도 즐기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런 내가 너무나 낯설었다.
오해와 이해에 관한 한 나는 비범한 넓이와 깊이를 가지게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길의 끝이란 겨우 동네 하천이나 한강 같은 곳이 아니라, 지중해나 태평양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집요하고도 지루하고 지난하게 이어지는 이 ‘이해’라는 주제를 안고 끝없이 밀려오는 생의 파도가, 이러한 삶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다정한 음료수 사진
사진은 때로 진실을 가르는 한 단면이 되기도 한다. 한편, 음료수는 찍었지만 인물 사진을 찍을 생각까지는 아무도 미처 떠올리지 못했는데. 그만큼 신나거나 착 달라붙는 관계적 점성까지 생기지는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도 있었다. 파워 유스들의 수다 속에서 나는 거의 넋을 놓고 있었고. 어쩌면 기념적인 날일 수도 있었지만.. 사진이란 어떤 정점에서 찍어야 하는 것. 운명을 거슬러 사진을 남기는 일은 어차피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내가 사전에 알아봤던 곳은 커피는 전문적으로 잘 하는 집으로 보였으나 어딘지 쳐지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2층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조금 올드했다). 나는 막내 여자 아이의 제안을 적극 받아들여 암묵적 권력을 이용해 다시 자리를 옮겨보자고 했다. 정말 나가기 싫어하는 듯 했던, 건장한 장정 체격의 남자 아이들마저 못이기는 척 따라나설 만큼의 굉장한 권력이었다.
역시 엠지(엠지 그 이상)는 엠지군. 막내가 지나가면서 재빨리 눈썰미로 본 집이었는데 분위기가 이전 카페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더 바랄 것 없이 좋았다(필자의 이상이기도 했던 양옥 주택 카페였다).
메종 드 **
가을에 야외 테이블에서 산딸기 케이크와 플럼 원두 아메리카노 즐기면 더 없이 좋을 것 같았다.
아이들과 헤어지고 나는 굉장히 독특한 감정을 느꼈다. 한바탕 좋고도 어색했던 교제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저녁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났다. 그리고 또 다시 죽을 만큼의 외로움에 삼켜져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할 일들을 하겠노라며 다시 카페로 돌아왔다. 그렇게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노곤하게 잠들고 말았다. 가을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