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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무정도 아닌 무 1

newwing 2024. 7. 12. 18:07

피씨방 일을 도와주던 어느날이었다. 할 줄 모르는 가족의 피씨방 일을 닥치듯이 이것저것 하고 있을 때였는데. 몇일 간 밤을 지새며 도왔던 날들 속에서 한 장면이 나의 마음 속에 깊숙이 남게 되었다.

 
에어콘이 세차게 돌아가는 서늘한 지하에서 피씨 방 일을 하다 보면 밖이 날씨가 어떤지, 지금이 몇 시인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잊고 어떤 암흑의 시간 속에 있게 된다.

몇 날을 해봐도 일은 손에 익숙해 지지 않았다. 마음은 분주하고, 작은 실수라도 하면 그 일을 잊지 못하고 다른 일에도 연달아 집중을 하지 못할 정도의 결벽증이 있던 나는, 그야말로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대단할 것 없는 그 일들에 임하고 있었다.
 
마음도 공간도 어두침침한 피씨방에서, 그렇게 나는 밤을 꼬박 지샜고, 바깥은 어느덧 광명이 밝아온 아침이었다. 수많은 문제들 속에서 설상가상 프린트 출력 시스템에까지 어떤 문제가 있던 차, 한 젊은 여자가 아주 상쾌한 기운을 안고, 어떤 기대감이 가득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게임을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은 차림이나 인상의 그녀는 무엇을 하러 왔든지 도무지 이 어두침침한 지하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잠깐 컴퓨터 앞쪽에서 무언가를 하는가 싶더니, 카운터 안
쪽 공간에서 피로감과 혼돈과 수줍음으로 은신해 있던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혹시 프린터 출력 할 수 있나요?’
‘아…. 네. 근데 어… 어떤 어떤 문제를 해결하면 가능해요.’
 

여자는 정말 인상 깊은 미모를 갖고 있었다. 정신적 여유가 없던 와중이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나는 그녀에게나 그 상황에 훨씬 더 빠져들어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상황을 정확히 알려주고,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그녀가 기다려도 괜찮은 것인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고(사실상 가다듬지 못하고) 컴퓨터로 무언가를 찾아보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는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기다리시거나, 죄송하지만 바쁘시면 다른 곳에서 출력할 것을 권유했다. 시간의 여유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녀는 그냥 기다리겠다고 했다. 나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오랫동안 진땀을 뺐고, 결국 문제가 어찌어찌 해결되어 한참 후에야 출력이 가능해졌다.
 
왜 그랬는지, 출력물은 카운터 쪽에 있는 프린터를 통해 출력을 해주어야 했었다. 눈을 감고 종이를 집어들지 않는 이상 인지상정 그렇게 출력되어 나온 출력물은 내 눈에도 대략 들어오게 되었다. 출력되어 올라온 것은 모종의 이력서 같은 종이 몇 장이었다. 그러면 물론 안 되는 것이기도 했고, 더욱이 정신도 없는 중이어서 내용까지 자세히 뜯어보지는 않았지만.
 
기억나는 것은 그것이 이력서 종류의 서류였다는 것과, 서류의 맨 위 구석에 있던 여자의 증명사진이었다. 증명사진조차 역시 인상적이었다. 활기가 넘치는 표정과 단정한 옷차림, 신선한 마스크. 인사 담당자가 최소한의 직관력만 가지고 있다면 뽑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과연 들어올 때부터 설렘과 생기 가득한 표정이었는데. 인생의 어떤 한 구간을 지나며 설레는 출발을 앞두고 있었나 보다. 여자에게서는 대학원을 졸업할 예정이라든지 어떤 좋은 회사를 이제 막 퇴사했다든지, 가령 그런 분위기가 풍겼다. (대학원을 떠올린 것은 은은하게 느껴지는 지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


 
* 음악
Bosco(Forest) - Hemio

https://open.spotify.com/track/5xgctu8pfsFGaYmBNb7HJS?si=4YbH6HaAQfiDe60eBxa4Hw&context=spotify%3Aplaylist%3A37i9dQZF1E8ImYqcUctURU

Bosco (Forest)

Hemio · Song · 2015

open.spotify.com



* 제목이 '무정도 아닌 무'라고 쓴 이유는 차차 써야겠다. 지인과의 약속에 급히 나가게 된 차여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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