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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호선. 지하철은 종로3가역을 지나 종각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릴까 말까.
안경 매장에 들를까 말까. 안경을 샀던 교보문고 안의 매장에 가려면 도래하는 역에서 내려야 했다.
오후녘, 오늘은 해야지. 일어나야지. 작은 옥탑방을 나서며 분기탱천했던 나였다. 이 정도로 기분 좋게 의욕적인 상태가 된 것이 실로 몇 달만이었던지.
그렇게 의욕적이 된 결과 나는 무려 세 개의 안경을 가방 안에 넣어 가져왔다. 어딘지 다 비뚫어지고 문제가 생긴 안경들이었다.
자연적으로 헐거워졌거나 밟았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제각각 헐렁해지고 틀어진 테들. 오늘은 그들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하고는 가방에 넣어온 것이었다. 이제 미루지 말자. 닥치는 대로 하자. 앞으로 좀 가자. 나도, 앞으로.
- 하고 생각하며 아이스 커피를 내려서 담아온 차가운 텀블러와 함께, 그들이 가방 안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그때 관자놀이와 볼에 엷게 핀 검버섯을 보았다. 내 바로 앞 지하철 복도를 걸어 지나가시는 할머니의 옆볼이었다.
볼에 엷게핀 할머니의 검버섯. 굳게 입을 다물고 묵묵히 앞으로 걸어가시는 할머니의 옆볼을 볼 때 왜인지 결심이 섰다.
내리지 말자. 또 다시 엷게, 얇게, 얄팍하게 존재하지 말자. 쫓기며 과업과 과업들에, 태스크에 허덕이지 말자고 다짐했던 나를 또 배신하지 말자.
2
‘소설을 써야겠다.’ 저마다가 심포니 오케스트라처럼 들을 이야기를 써야겠다. 때마침 나는 왼쪽 갈비뼈에 데이먼 나이트의 ’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을 바싹 붙이고 왼팔로 끼운 채,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있었고. 때마침 아바도가 지휘한 말러 심포니 2번 부활을 듣고 있었고. 때마침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수많은 외국인들을 마주치고 있었다.
공항철도로 환승하는 구간의 서울역. 금발의 흰 피부를 가진 외국인들이, 나의 반대편에서 퇴근하는 직장인들 틈에 섞여 활기차고 힘있는 연어들처럼 각기 큰 짐을 이끌고 헤엄쳐 오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게르만족, 스웨덴, 또는 오스트리아. 그리고 차가운 퇴근러들. 헤드폰을 쓰고 생각에 잠긴 창백한 여자. 서로를 시선으로, 손으로 쓰다듬는 정겨운 연인.
직장에서, 인천공항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와, 인천으로 내려가는 나의 에스컬레이터가 영화처럼 느리게 교차하고 있었다. 지인이 사는 인천에 잠시라도, 나는 마음을 쉬러 가는 길이었다. 반대편 에스컬레이터에는 유독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저토록 많은 생이 얌전히 서서 올라오다니.’
바로 그때였다.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잘 쓰든 못 쓰든, 아무튼 써봐야겠다. 사람들이 기대어 작은 시름들을 잊을 수 있는. 기대어 웃고 울수 있는 심포니 같은 이야기를 나도 써봐야겠다.
관조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자 시간이 멈춘 것처럼 길게 감상되었다. 십 여 초쯤 되었을 찰나를, 서울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안에 빼곡하게 서서 가만히 몸을 싣고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영원처럼 바라보았다.
3
한가하게 가운데 자리에 앉으려다가 뒤쪽에서 쫓아 밀고 오는 기운을 느끼며 왼쪽으로 비켜 앉아 주었다. 여자 두 명이 거친 매너로, 검은색의 커다란 패브릭 캐리어를 끌고 뒤쫓아 앉았다. 내 바로 오른쪽에 앉은 여자는 당당히 더 옆으로 가 주기를 바라는 듯 아쉬워 하는 것이 느껴졌다.
낯설고, 무척 날것스러운 제스처들이었다. 그렇게 한사코 억척스럽게 자리를 잡고는, 그녀들의 손에 들린 휴대폰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들의 억척그러움처럼 화면에 그득한 한자들. 다리 사이에 캐리어를 끼우고 앉은 반바지 차림 여자의 얇은 왼쪽 종아리가, 무심결 (역시 반바지를 입은) 나의 오른쪽 종아리에 닿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여행객이라기에는 너무 커다란 캐리어였다. 한국에서 중장기간 일을 하고 돌아가는 걸까. 언듯 별로 좋지 않은 냄새가 코 안으로 들어왔다. 땀과 체취와 기름 냄새가 뒤섞인 냄새였다. 중국은 아직 중국이구나. 나는 속으로 그토록 무례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 그처럼 한심한 단상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오른쪽에 앉은 이십대의 여자가 딸 같아 보이고 나와 다리를 맨살로 부딛힌 여성은 젊은 엄마 같아 보였을 때, 이내 올바른 사유의 상태가 되었다.
그들의 냄새와 몸짓은 성스러운 것이었다. 어차피 사는 것이 다 이렇게 치열한 살 냄새와 땀 냄새로 되어 있는 것일진대. 살아있거나, 썩어서 죽거나 둘 중에 하나일 텐데. 나는 살아있지도 죽지도 않았으니까. 방부 처리한 사람처럼 가만히 방부되어 있었으니까. 나를 생각한다면, 그들의 살아있음은 성스러운 것이라고 말해야 했다.
맞은 편에는 너무 선명히 대조되어 보이는 세련된 분위기의 이십대 한국인 여자들 두 명이 셀카를 찍고 있었다. 내 왼쪽에는 키가 크고 세련된 여자가 젊은 남편의 호위를 받으며 막 자리에 앉던 참이었다.
마주보고, 또 나란히 앉은 우리들 중에 누군가 천했다면, 천함은 나의 것이어야 했다. 그 칸에서 방부제 처리된 나의 존재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없었다. 다들 각자 숭고한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들 속에서 시종일관 빠져있던 생각은 실은 이런 것이었다. 소설은 위대한 것이구나, 소설은 위대한 것이구나.
또, 다 살고 있는데 나만 죽어 있(었, 어 왔)구나.
할머니의 옆볼을 보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진 것은, 그렇게 마음의 여유를 갖고는 지하철에서 내리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의 안에 잠겨 있던 글들을 지극한 일부라도 꺼내어 써보게 된 것은, 긴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마름을 스스로 상기시키는 글을 쓴 것은, 잘한 일이었다.
검버선이 어여쁘게 핀 할머니의 옆볼을 보면서, 얕고 짧은 이야기만 소비하고 마는 사람이 되지 말자, 장대하고 깊은 서사를 존재에 머금은 사람이 되자, 말러의 심포니처럼 길고 깊은 호흡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