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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8일
이 글에서는 어떤 염세적인 캐릭터가 많이 드러납니다.
자물쇠로 굳게 잠근 일기장에만 쓸 법한 글이 담겨 있습니다.
글쓴이에 대해 좋은 이미지만 갖고 싶은 분들은 여기서 멈춰주세요.
하지만 대단한 자물쇠 일기는 아니에요.
흑화된 오리피.
절망의 라이터.
가 살짝. 아주 살짝 비치는 정도로.
하늘거리는 암막 커튼 사이로.
케이스 1
고등학교 때는 한 친구가 그랬다. '솔직히 **이 노래 잘하는 것 빼고 별 것 없지.' 사실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마찬가지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들 두 명 중 한 명이, 4 분단에서 낄낄거리며 친구의 입을 막았는데. 입을 막힌 친구가 손을 뿌리치며 **아 - 하면서 나한테 이른 것이다.
좋은 친구들이었는데. 아주 마음을 통하는 친구들은 또 아니었고, 애매하게 친한 친구들이기도 했고. 어쨌든 나는 관심도 없어서 그냥 뭐라는 거야- 하는 투로 힐끗 보고 웃어넘기고 말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루에도 스무 번씩은 거쳐가는-화조차 낼 가치가 없는-시시한 장난들 중 하나였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뒤늦게 궁금해졌다. 친구들은 왜 그렇게 나에게 관심을 갖고 뒤에서 이야기하기를 즐겼을까.
고등학교 때는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나를 정말 그리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데도, 좋아하거나 건드리거나 그러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그렇게 축소된 활동을 하던 시절에도, 미약하게나마 그랬다. (오히려 화제의 중심에 자주 제대로 서게 되곤 했던 것은 20대 후반 이후에서 삼십 대였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1) 그것은 나의 확실히 보이지 않는 면면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상상력이나, 어떤 풍성함이 나를 그렇게 어둡게 보이게 하거나, 자신감 넘쳐 보이게 하거나, 풍요로워 보이게 하거나. 어쨌든 그것은 어떤 운동을 일으켰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말이다. 그것은 다층적이었고, 양면적이거나 역설적인 방식으로 내면에서 운동했는데. 그런 것들이 다른 친구들에게는 별로 없던 면이었나 보다. 소위 나의 한끝. 엣지. 모서리. 그런 것이었나 보다- 생각해 보는 것이다.
2) 글쎄, 그때는 몰랐는데. 아마 내가 너무 의기양양하고 늘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는 듯, 자신감에 넘쳐있고, 무언가 사실 딱히 못하는 것도 없어서가 아닐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렇다. 당시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던 *공부를 빼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뒷자리에 앉아서 다크함까지 풍겼으니까. 사춘기 고등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차지하는 캐릭터였나 보다. 시쳇말로 만능형 재수탱 스타일.
케이스 2
'너 솔직히 글 쓰는 거, 그거.. 뭔가 표현 잘하고, 글이 흥미로운 거. 응, 그래. 글 잘 쓰는 거. 솔직히 너는 캐릭터 자체가 전부인 사람이잖아. 그거 빼면 시체. 그러니까 그냥 너를 찍으면 콘텐츠가 되는 거야. ㅋㅋㅋㅋㅋ 근데 그걸 너만 몰라. 유진박처럼 그냥 너는 바이올린만 켜. 그럼 우리가 돈이 되게 해 줄게.'
보통 누군가 '너는 그것뿐'이라는 식으로 말할 때는 이런 식의 함의가 있다. 그것조차 사실은 그것만으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글 잘 쓰는 것과 노래 잘하는 것의 공통점도 그렇다. 그냥 어떤 '예藝(재주-예)'적 재능을 가지고 있을 뿐, 맹탕맹탕한 물과 같은 사람이라든지,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재능은 없다든지, 심지어 어딘지 모자라다는 식의 함의로 읽힐 수 있다.
독백(사유)
관객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각각의 캐릭터가 스크린에서 살아 움직인다면 잠잠히 영화를 관찰하는 신중한 관객들에게는 어떻게 비칠까.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캐릭터를 유형화해본다면 말이다.
영화는 언제나 관객에게, 주인공의 시선에서 보이는 프레임을 보여주며 그것을 상당한 비중으로 다룬다. (악역이라도 매력이 있는 악역이라면 그의 시선을 충분히 조명해 준다.)
밀도 높게 영화를 찍을 줄 아는 감독이라면, 단역급 배우들의 의미 없는 시선을 관객에게 한 컷도 보여주기 싫어할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의미 없는 프레임을 만들어 관객의 시간을 뺏는 감독이 어떤 영화제에서인들 극찬을 받을 수 있겠는가. 관객이 보기에 매력이 없는 캐릭터는 비중이 줄 수밖에 없다.
오 분이면 충분하다. 대화를 해보면 이미 자기 것이 있는 사람과 자기 것이 없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가 무슨 영화를 봤는지. 그의 음악 플레이리스트는, 종교는. 언제 어떤 책의 어디쯤에 책갈피를 꽂아 두었는지. 대화를 하면 어느 정도는 다 보인다.
자기 관점에서 보는 철학이 없다. 매력적이거나 독특한 관점이 없다. 그러면 사실 이미 같은 수준에서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있지도 않은 후속 약속을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떠야 한다. 한 배우의 말처럼 버스를 타야 한다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핑계 댈지라도. 그런 부장님들로부터는 전속력으로 도망쳐야 한다.
무엇을 보는가. 결국 그게 관건이다. 무엇을 보는가-가 결국 인생을 많은 개런티를 받는 주연과 단역급의 조연으로 나누는 기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런 시각이나 그런 말의 내뱉음 자체가 굉장히 지혜롭지 못한 시각이거나 교만한 말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실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자기의 빈곤함을 드러내는 것임을 자신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타인에 대한 어떤 질시나 나름의 관찰을 바탕으로 한 굉장한 관심 같은 것이 그런 생각이나 말의 배경이 될 법하다.
결론
정말 진지한 사람이나, 잘 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도, 낄낄거리며 누구에 대해서 평할 시간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고등학교 때처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살기만 하는 것이다. 아무 특색도 없이. 내가 가장 한심하게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굳이 불필요하게 지극한 관심을 보일 때 시선을 줄 여유도 없는데 관대한 웃음이라도 보여주는 것. 그것은 그렇게 시크한 웃음이라도 흘려보내주는 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진심 어린 동정과 기도라는 것. 정작 못나게도 자기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늘 자기 눈에 보이는 주연들의 주변만 맴도는 아웃사이더들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 얼마나 흥미를 잃었었냐면, 지금 생각해 보면 어쨌든 고등학생이었는데. 그럴 것까지는 없었는데. 공부를 안 하기로 결심까지 하고 안 하는 실행을 정말 실행으로 옮겼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