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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깊이

몇백 년 된 큰 나무 같은 곳 2025. 1. 28. 17:46

난 오늘도 자전거에 올라타 있었다. 오래 되어 귀에 닿는 천이 다 해진 헤드폰에서는 색소폰으로 연주한 올오브미가 흘러나왔다. 밤하늘에서 꿈처럼 눈발이 나리었고, 녹지 않은 흰 눈이 길 위로 눈부시게 덮혀 있었다.

지난 주일에는 예배 후에 두 아이를 데리고 치킨집에 갔다. 그간 준비성 없이 엉터리 예배를 인도한 죄악은 치킨 따위로 갚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 안에는 한낱 치킨으로나마 조금이라도 속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미세하게 있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은 잘 몰라도 치킨은 열심히 사줬습니다. 나에게도 구교의 공로 속죄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경직된 교회 문화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인격적인 불가항력적 한계가 있음을 절절히 체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매콤국물떡볶이와 허니콤보와 건널 수 없는 인격의 강과의 사투를 벌이다, 시간이 우리를 구원해 주었다. 집에 가는 길. 남자 아이는 순순히 같은 방향으로 따라나섰고, 여자 아이는 굳이 같은 방향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걸어가도 그리 돌아가는 길은 아닌 것 같았다.

나의 존재의 한계가 절반쯤이라면, 절반은 4차산업혁명 때문이었다. 우리는 주문을 하자마자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각자의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이건 아니지. 각성하고 나는 휴대폰을 덮어놓았고, 여자애는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고, 남자 아이는 음식을 기다리는 내 휴대폰만 들여다 보려 했다.

아이가 보고 있던 것은 이른바 shorts라고 불리는 영상들이었다. 짧은 영상들을 연신 위로 올리며 보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희 정도 나이가 엠지는 아닌 것 같고.. 뭐라고 부르지? 그러자 아직 아기처럼 귀여운 아이가, 고개를 들어 바로 대답해 줬다. 알파 세대요. 아, 알파… 세대.

교회 전도사님과 마주 앉아서도 스마트폰만 바라보는 아이를 나는 개체의 존재로서 공감할 수 없었다. 재빨리 세대의 문제로, 집단 문화의 탓으로 이해하며 수용하려는 관점으로 전환했다. 책은 재미가 없니? 나도 많이 못 보지만 지니고 다니기라도 하려고 애쓰는데. 책에 좀 취미를 붙여봐. 탐스럽게 북커버로 싸서 들고 다니는 책들을 보여주며 환심을 사보려 했지만 나의 전략은 참패했다. 가여운 세대에 속한 이 아이들은 영영 길고 느리고 깊은 이야기의 세계와는 닿지 못할 것만 같았다.

동네에서 오랜만에 보는 동아리 동생과 저녁을 먹고 역까지 배웅하고도 나의 발걸음은 집으로 향하지 못했다. 글이라도 써보려고 헛헛한 마음에 카페에 들러 페북을 연 나를 즉시 막아서는 것도 짧은 영상들이었다. 여자 연예인이 공중 목용탕에 갈 수 없는 이유-라니 너무 궁금하군. 이것만 열어보고 글을 쓰자. 제목과 썸네일만 봐도 바로 눌러 보고 싶은 마음을 자제시키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들의 삶에서 스마트폰을 지우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영혼이자 시간이자 자기 자신인 것만 같았는데. 나는 영혼을 팔아버려도 좋다고 느낄 정도로 숏폼이란 형식과 내용에 속정이 있지는 않은 세대였다. 이따금 짭짤한 스낵처럼 유혹했지만 나에게는 늘 그리워하는 세계가 따로 있었다.

풍요로운 마음과 흰 눈처럼 넓은 이해심. 올리브 나무처럼 비옥한 추억. 눈발에 이렇게 뒤숭숭해지는 날이면 떠오르는 한 날이 있다.

열한 살이었다. 어느날 생기가 넘치는 한 여자애가 전학왔다. 이름은 h모모. 아직 낯선 것이 많을 테니까 다정하게 대해주렴.

h에게 우리의 다정함은 필요 없었다. 이미 전학온 며칠 뒤부터 그 아이는 원주민 9반 아이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을 정도로 활발하고 매력적이었다.

오늘처럼 눈이 떨어지던 그날. h와 단둘이 만났다. 우리는 그 아이의 아파트 놀이터 옆길에서 하얗게 웃으며 눈사람을 만들었다. 우리 키의 반은 되었던 눈덩이 두 개를 위로 얹은 커다란 눈사람을 길가에 전시해 놓았다. 그 애는 정말 생기 가득하게 예뻤고, 흰 눈과 함께 나의 설렘은 하얗게 영혼에 각인되었다.

벙어리 장갑 위로 느껴지는 눈의 찬 감촉과, 볼이 새빨게지도록 들이마시던 찬 공기. 그 애의 밝은 표정 같은 것. 그날 몇 시간 동안 만들었던 눈사람은 다 녹았지만 나는 휘발되는 야속한 시간 속에서 영원을 새겼다.

내가 그리워하는 세계는 그날의 소년에게 있다. 너무나 가난하고 초라한 날들속에서 나는,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빈곤하고 초라해 보이는 나의 내면 속에, 채 다 캐지 못한 보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오로지 그런 생각으로 계절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