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백 년 된 큰 나무 같은 곳 2025. 1. 25. 04:00



제시가 무대 위로 올라온다.


방백
죽고 싶어. 죽고 싶어. 그런데 죽고만 싶지는 않아. 살고도 싶어.


무대가 바뀌고,
제시와 블론드가 스타벅스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제시: 사실 나는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는데. 정말 나는 가만히 있었고, 유일하게 생각한 것은 하루하루 정말 살지 말지만 고민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불현듯 나타나 득달같이 다가와서 이 사달이 난 거예요. 정말 인생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블론드: 음.. 제 생각에는 우연히 걸린 것 같지는 않아요. 한 명만 걸려라, 한 명만 걸려라. 그러고 있다가 걸린 것 같아요. 무의식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인지하지는 못하셨겠지만. 그게 누구였어도 아마 힘들 때 옆에 있었던 사람한테는 이렇게 빠져드셨을 거예요. 더구나 그게 제시 님이시니까요. 워낙 감성이 풍부한 제시 님이시니까, 더 그랬겠죠.



그레이스의 무대 내래이션
정말 죽고만 싶었는데. 억울했다. 단순하고 고요하게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는데. 뜻하지 않게 모든 감각이 뒤엉켜 버리고 이렇게 힘들게 된 것이 괴롭고 화가 났다. 어떻게 하면 의도하지 않게 죽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거의 유일한 고민일 때였다.

꿈속에서 잠꼬대를 할 때나 혼자 있을 때 그립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 목적어가 무엇인지 일체 알지 못했다. 알고 보면 늘 그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그리고 있었다.

목적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제시는 가장 소중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성애가 그리워, 폭신폭신한 여성성의 품이 그리워-라는 뜻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모성애에 대해 사무치는 그리움이 있었다. 섣부르고 가볍게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늘 의식의 아주 깊은 곳에 자리해오고 있던 감정이었다. 아니. 그런 그리움은 그 자신이었다. 그것에 삼키워버려도 좋을, 그것은 제시 자체였다.

그런 중이었다. 뜻하지 않게 눈 밖에 있던 누군가가 그의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한 것은. 얼마 지나 눈썹에 걸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는 검은 눈동자 안으로 깊이 들어왔다. 목으로 넘어가 목에 걸렸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가시처럼 온몸의 피를 타고 돌아다녔다. 그러다가는 심장을 콱 찔러버렸다.

가시가 심장 한가운데를 찌를 때면 너무 아프고 저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눈가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나가 버려라, 지나가 버려라. 이 몹쓸 감정의 화염아 얼른 지나가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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