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일기
9시 58분.
알라딘 잠실새내역 점에 도착했다. 뛰고 헤메고 지나치기까지 하면서. 마침내 그곳에 입성하기까지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마감 시간의 당당한 입장의 기세에 두 명의 여직원이 깜짝 놀란다. 그중 배테랑 직원처럼 보이는 한 여직원이 마중 나오듯 다가오며 운을 뗀다. 저희가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서...
다 끝났다는 말을 하려는 줄 알고 포기하려고 했더니. 사시려는 책이 있으면 찾아 준다고 한다. 미리 검색해 두었던 스튜어트 켈스의 <더 라이브러리>와 한길사 대표인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을 말씀드렸다. 여직원은 곧바로 검색 피씨 앞에 다가가 능숙한 손길로 검색하더니, 이내 쏜살같이 사라져 더 라이브러리를 먼저 찾아왔다. 나머지 한 권을 찾는 동안 책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해 보고 있으라는 것이다(그 바쁜 와중에도 한 번에 두 권을 가져오지 않고, 내게 책 상태를 점검할 시간을 주려는 배려심이 감동 포인트 1이었다.).
그리고는 또 날쌘 제비처럼 사라지더니 금새 세계서점기행을 뽑아왔다. 책 가격이 무려 사만 사천 원이었다. 미리 검색해 둔 바 가격도 알고 있었고 묵직하리라고 예상도 했는데.. 이건 너무 컸다. 표지 면적은 일반 책 여섯 권을 합한 크기였고, 두께는 거의 반 뼘 정도. 그러니까 보통 글자 크기로 인쇄되어 있다면 왠만한 시인이나 소설가의 평생의 전집쯤은 다 담길 수도 있을 만한 판형과 두께였다. 책을 받아 들고는 펼쳐 보니 큰 글자 도서였다. 아무리 극심한 노안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글자 크기였다. 머쓱타드한 표정으로 세계서점기행은.. 안 하겠노라 말씀드렸다.
여자 혼자 들고 오기 힘들 정도의 무게감을 가진 그 책을 들고 오고서도, 큰 글자 도서인 것을 확인도 안하고 가져다 달라고 한 내 앞에서 직원은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미안해 하거나 눈치를 안 봐도 될 것 같은 안도감. 감동 포인트 2.). 결제를 하는 과정이나 인사를 하며 아이 컨택트(감동 포인트 3.)를 정성껏 하는 피니쉬 모먼트까지, 완벽한 친절함이었다. 스튜어디스를 방불케 하는 친절함에 감동했다. (감동 포인트 4,5,6,7…)
저토록 아름다운 친절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찰나에 전해받은 따듯하고 반듯한 다정함의 여운에 취해 홀린 듯 서점을 나왔다. 마침 서점 바로 앞에 정류장이 있었고, 이 분 뒤 버스가 왔다.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찬 만원 버스는 기억이 나지도 않을 만큼 오랜만이었다. 고지식한 사람들이 이미 포화 상태로 보이는 앞문 쪽 공간으로 낑낑거리며 올라타고 있었다. 나는 주저함 없이 뒷문 쪽으로 다가가 센스있게 도시 남자다운 몸짓으로 올라탔다.
곧이어 다음 정거장 쯤에서 중학교 이삼 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들 여남은 명이 뒷문으로 밀고 들어왔다. 탈압박은 꿈꿀 수도 없는 중딩들의 러쉬였다. 그 와중에도 나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무척 흥미로운 도입이었다. 기대 이상으로 좋은 책 같았다.
창문으로 내가 보였다. 버스 밖으로 번져가는 밤 풍경을 배경으로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백오십도 안되는 여자 중학생 아이들 틈에 뾰족이 솟아오른 남자. 여중생들보다 더 여려 보이는 면 재질의 흰 셔츠에 군청색 자켓을 입고 그 복잡한 버스에서 집요하게 책을 들고 있는 이상한 아저씨.
미세하게(?) 나온 아저씨의 배 위로는 분식집 엠보싱 티슈에 물을 묻혀 아무리 지우려해도 지우지 못한, 고추장 소스 자국이 선연히 남아 시선을 강탈하고 있었다. 연약하고 순결한 면 남방에 묻은 이 핫바 소스 자국이 나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놓치지 말아야 할, 어떤 스티그마 같았다. 떡볶이와 순수에 대한 집요한 집착.
더 라이브러리. 친절했던 서점 직원. 달큰한 청사과 냄새를 풍기는 여자 중학생들.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해 들른 천호역의 깨돌이 김밥. 주일 이후로 거의 삼일 간을 칩거하다가 시내 여행을 한 나에게 모든 것들이 낯설고 새로웠다. 귀에 꼽은 이어폰에서는 Martin Stadtfeld의 Piano Songbook이 영원한 음악처럼 흘러 나왔고 바람은 찼다. 무척 낯선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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